2017년 4월30일 일요일 맑음 28도
날아가는 새들도 쉬어가는 고개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마디마디마다 숱한 사연과
애환이 깃든곳.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은 대자연과 역사,문화가 살아 숨쉬는 그곳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영남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갯길로 백두대간의 주흘산과 조령산 일대의 원시림이 자연그대로 보존된
청정 휴식공간이기도 하다.
날씨가 아침인데도 덥다는 느낌이 든다.
어제 도착해서 '새재추억" 에서 숙박했다.
콘도처럼 되어 있는데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인지 깨끗하고
2사람 1박에 7만원줬다.
숙박을 예약하지 않고 왔고 차사발축제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7만원이 적당한것 같아서 결정했다.
한국관광100선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문경새재는 너무나 유명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산에 다니면서 많이 와보고 둘러보고 옛날에는 야영지에서
텐트치고 하룻밤 자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변해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것 같다.
제1관문 주흘관은 영남지방과 서울을 이어주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인 문경새재의 첫 번째
관문으로 문경새재의 3개 관문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숙종 34년(1708)에 축조되었으며 우라나라 최초의 공사 실명제을 실시한 곳이다.
임진왜란 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은 3개의 관문이 사적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고
많은 문화유적과 함께 옛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넘나들던 장원급제길,채바위 등
선현들의 발자취도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1관문에서 3관문까지 문경새재 흙길을 맨발로 걸을수 있어 몸과 마믐을 치유할수
있는 힐링관광으로 제격입니다.
아래는 조령원터 입니다.
주흘산 조령관문 1관문과 2과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 부터 발달하여 새재에만
동화원,신혜원,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다.
아래는 주막 모습입니다.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면서 서로 정분을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조국술례 자연보도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주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고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로 1470년(성종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3월(건양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정면3칸 측면1칸으로 이루어여 있다.
조선시대 국경수호와 산성등을 지키고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세운 비로
한글과 한자가 혼용된비가 아닌 순수 한글비는 세종대왕 한글 편찬 이래
산불됴심비가 최초이다.
조곡폭포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 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 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조령산성을 쌓을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5월의 싱그러움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연녹색과 짙은 초록과의 조화 나는 이런 이시기의 대자연을 사모한다.
누구나 이런 대자연을 좋아하겠지만 특히 나는 이시기의 모든 자연을 보고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여행할수 있음을 고마움을 느낀다.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가질수 있다면 행복할것 같다.
동화원입니다.
제3관문 조령관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을 지날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이 관문이며 또하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형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은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이름한다.
문경새재의 제3관문이자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조령관
새재 정상에 우뚝 솟아 더욱 늠름해 보인다.
오랑캐를 막기위해 쌓았기 때문에 왜적의 침입을 막는 제 1관문과
반대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책바위
책이 펼쳐진 형상을 한 바위로 문경에서 가장 좋은 기가 모여 있어 이곳에서
한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오며 장원급제를
기원하던 영험한 곳으로 널리 아려져 있다.
제1관문에서 3관문까지는 10.5km 이다
길은 전체적으로 차가 다닐수있고 넓다.
그리고 비포장 길이라고 생각하면된다.
우리는 아침 7시부터 걸어가서 3관문까지 갔는데 6시간소요해서
1시에 도착했다.
올라갈때는 2관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는데 2관문에서 3관문까지는
조금 길어서 힘들었다.
내려올때도 3관문에서 2관문까지는 별로 멀다는 느낌이 안들었는데
2관문에서 1관문까지가 조금 힘들었다.
찻사발 축제해서 인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3시30분에 나왔는데
우리가 나올때도 차가 엄청 많이 들어가고 있었다.
도로에도 새재로 들어가는 차는 엄첨 밀려 있었다.
아무튼 문경새재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느꼇다.